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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스페인 (2) 코리빙 적응이 뭔가요

슬로우마드 이미써니🌞 2023. 7. 29. 01:12

영국에서 스페인으로 날아와서 예정해놨던 차를 놓치고 버스를 다시 타고 이 작은 마을 하베아Javea에 도착하기까지. 참 피곤도 했는데 막상 도착하고 나니 처음 맞는 스페인의 분위기에 나는 젖어들었다. 흠뻑인지 살살인지도 모르게. 배가 고파서 다른 코리버coliver(코리빙coliving에 같이 거주하는 이들을 일컫는다.) 애들한테 밥 먹으러 갈만한 데를 물어보니 레스토랑을 여러 곳 추천해줘서 그 중에 한 곳을 찾아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배가 고플 때는 조심해야하는데, 메뉴를 세개나 시켜버렸다. 글래스 와인도 시켰다. '와인 진짜 싸네...' 결국 다 먹지 못하고 앉아서 배부른 숨을 내쉬는데, 교회 종이 울린다. 유럽에 있다는 걸 알려주는 종소리. 

남은 음식을 싸가지고 천천히 코리빙으로 돌아왔다. 이미 어둑해지고 거실에 앉아있는 다른 코리버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거나 하지는 않지만, 이야기를 듣고만 있어도 다른 이들 사이에 있는 내가 함께 있음이, 내 존재가 이 안에 녹아있음을.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신기하다. 나를 정말 반가워하는 게 진심이다. 모르는 사람들인데, 내가 어떤 모습이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이들내가 이런 사람들을 만난 적이 얼마나 있나. 나를 낳아 키운 부모님도 나를 판단하는데. 

다음 날 마을 장이 열린다고 한다. 그 다음 날에는 다같이 요리하는 패밀리 디너가 있다고. 잘 때가 다되니까 우리 내일 뭐할래의 주제로 넘어가서 애들이랑 장보러 가는데 따라가기로 했다. 어차피 나도 장을 봐야하니까. 나는 이런 마켓을 아주 좋아해서 크게 많이 사지 않더라도 마켓 구경하는 것을 즐기는 터라 신이 났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뭘 사야할지를 머리 속에 정리한다. 야채는 뭘 사야하나, 납작복숭아 안먹어봤는데 있으면 사야지. 캐나다에서 온 친구와 나섰는데, 몇 걸음 떼지도 못하고 멈춰섰다. 츄러스 트럭. 장날이라고 와있는 츄러스 트럭에서 우리는 멈췄다. 즉석에서 튀긴 츄러스에 초콜렛 소스를 큰 통으로 사서 거실로 돌아왔다. '우리 이거 다 먹고 다시 나가자.' '그래, 장보는게 대수야, 어차피 점심 때까지는 장 계속 열려있으니까 괜찮아.' 우리 말고도 츄러스를 사들고 오는 애들이 많은 거 보니, 거의 마켓이 열리는 날마다의 일과인 듯 했다. 초콜렛 소스를 나눠줬다. 입에도 묻고, 손에도 묻고, 옷에도 묻고, 탁자에 흘리기도 했는데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저 재밌어. 신나. 맛있고. 뭘 할지가 기대돼.

다시 장을 보러 나선다. 10가지가 넘는 다른 올리브를 파는 올리브 상인이 눈에 들어온다. 눈이 마주쳤다. 잘생겼다. 웃으면서 올리브를 샀다. 자주 찾아먹는 건 아니지만 사놓으면 먹겠지 뭐. 그 이후로는 잘생긴 사람을 못봤다. 맛있는 납작복숭아를 샀다. 하루에 한개씩 먹어야지 하고 5개를 샀다. 토마토도 사고, 아보카도도 샀다. 장터에는 식재료 외에도 가방이나 로션 같은 생필품도 팔았다. 나는 신선하다고 생각되는 야채랑 과일만 샀다. 아 올리브도 샀지.

돌아와서는 노트북을 들고 코워킹 스페이스에 들어가서 일을 시작했다. 일하는 건 안 신나지만 그래도 해야지. 신나게 살려면 돈을 벌어야 하니까. 이메일을 읽고, 고객들 이메일에 답장을 하고, 접수할 서류들을 체크하고, 리서치가 필요한 일들을 처리한다. 일에 집중하면 생각보다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무슨 일이든 몰입하면 그렇지. 코리빙 안에 있는 코워킹 스페이스는 다른 공간보다 어둡고 서늘하다. 돌벽인데다 창문이 없어서. 코워킹 스페이스가 코리빙 밖에도 따로 있는데 걸어서 3분 밖에 안 걸리지만 나는 귀찮다. 누가 알았겠나, 내가 귀찮음의 대명사가 될 줄.

애들 몇 명이 다음 날 패밀리 디너 재료를 사러 슈퍼마켓에 간다고 한다. 같이 갈래? 물어보는데 그러겠다고 했다. 어디있는지 지도 찾아보면서 가기 귀찮으니까. 이야 신세계를 발견했다. 스페인 슈퍼마켓에서는 오렌지를 그 자리에서 짠 주스를 살 수 있다. 기계와 빈 병들이 진열되어있고 주스용 오렌지도 쌓여있다. 오렌지를 넣고 병을 놓고 손잡이를 돌려서 짜기를 시작하면 주스가 고대로 병에 담긴다. 최대한 꽉꽉 담아야지. 이렇게 신선한 오렌지 주스 너무 좋아. 짜릿해. 상큼해!

 

 

코리빙으로 돌아와서 일을 마저 끝냈다. 해변가에서 일하고 돌아온 애들도 있고, 반대편 동네에서 하루 종일 있다가 저녁에서야 들어온 애들도 있다. 주방에서, 소파에서, 요리하면서, 저녁을 먹으면서 각자의 하루를 나눈다. 뭘 했는지만 나누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느낀 생각과 감정을 나눈다. 공유는 강력하다. 공유를 통해서 나는 상대방을 이해하기도 하고, 나를 위한 단어를 찾기도 한다. 문제가 있으면 서로 도움을 주기도 하고, 그저 적극적으로 들으면서 상대방이 있을 공간을 지탱해주기도 한다. 우리는 서로를 존중한다. 각자의 존재와 개개인의 여정을 우리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응원한다. 우리의 길이 이렇게 겹쳐진 지금 이 순간을 음미한다. 코리빙은 그런 공간이라는 것이, 내가 이 안에 있음이 축복이다. 감사하다.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적응이 따로 필요하지도 않았네. 내 선택이 옳았음이 매 순간 증명된다. I belong here. 적응이 필요하지 않았던 이유. 이 곳에 오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이미 나는 이 곳에 속해 있었던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