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빛나는 디지털 노마드 생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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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노생활연재기 2022.5부터!

2022년 5월 (3) 어떻게 떠날 준비를 했나

슬로우마드 이미써니🌞 2023. 7. 14. 01:45

마음을 먹고나니 준비하고 계획하는 일은 쉬웠다. 여행갈 때 가장 즐거운 부분 중 하나가 여행계획 세우는 거라고들 안하나. 세개의 일감 중 출근하는 직장에 사직 의사를 전했다. 영어도서관에서 아이들의 원서읽기를 지도하는 일이었는데, 아이들이 오디오 파일로 들으면서 책을 읽으면 프로그램을 통해 퀴즈를 보는데, 맞은 문제와 틀린 문제 체크해주고, 단어 외우면 시험봐주고, 영어로 질문하고, 에세이 써오면 교정해줬다. 외고 아이들과는 철학적인 주제를 논리로 어떻게 펴나갈 것인지를 몇 차례에 거쳐서 나누기도 하고, 이 일을 통해서 북클럽을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영감도 얻었으니. 의미가 있는 직장이었다. 원장님과는 월급 협상부터 시작해서 막역하게 인생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도서관 식구들과 나들이도 다니고, 근속기간도 꽤 되었다. 2018년에 여기서 9개월 일을 했다가 디지털 노마드 생활을 처음 시도해보면서 관두었었는데, 판데믹으로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 떠나게 되는 때까지 딱 2년을 새로 채웠다. 3개월을 더 했으면 3년이 되었겠지만, 이미 결정된 내 마음을 굳이 숫자를 위해 미룰 생각은 없었다. 내 자리를 채울 사람을 빨리 구하시라고, 나는 최대 5월까지만 일을 할 것이고 그 전에 일을 할 사람이 구해지면 인수인계 해주고 더 일찍 관둬도 괜찮다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3월에 바로 의사 전달을 했는데 결론적으로는 사람이 잘 안구해졌다. 결국 출국하는 직전까지 꽉 채워서 일을 하고 나왔다. 

어디로 갈까? 3월에 마음을 잡고, 사직의사를 전달하고, 나는 어디로 갈지 리서치를 시작했다. 이번 디지털 노마드 생활은 이전에 처음 시도해봤던 때랑은 다르게 다른 디지털 노마드들과 많이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일자리도 그렇게 하기에 좋겠다고 생각해서 지원했던 거였으니까. Digital Nomad Community 를 키워드로 구글 검색을 다시 시작해서 유럽의 코리빙(Coliving)을 찾아봤다. 블로그들에 소개된 곳들 중에 계속해서 겹치는 곳이 보였다. 돈주고 협찬을 한걸까? 아니면 정말 어마무지하게 좋아서 이렇게 다 추천을 한걸까? 궁금해졌고, 여기를 시작으로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바로 결제를 하지는 않았는데, 떠날 준비를 하는 과정 중 하나가 카드 정리였기 때문! 한두푼도 아니고 백만원 이상을 긁어야하는데 기존에 쓰던 카드로만은 안되겠다는 생각에 신용카드와 입출금카드로 쓸 체크카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해외결제는 환율에, 카드 수수료에 실제 결제 금액 외에 붙는 것들이 많은데 앞으로 돈에 있어서 조금은 예민해져야 하는 나에게 그냥 아무 카드나 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해외 사용에 적합한 신용카드들을 검색해서 새로 발급을 받았다. 입출금카드도 해외 출금에 유리한 것으로 새로 발급했다. 

카드가 도착하자마자, 내가 첫 여정으로 선택한 스페인의 Sun and Co. (선앤코)를 예약했다. 나는 예전에 호주에서 장기로 호스텔에 거주를 했던 경험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방을 쓰는 것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고, 네 명이서 같이 쓰는 방을 예약했다. 그래도 750유로나 했다. 어휴 유럽 진짜 비싸네, 나 진짜 일 하나 관둬도 버틸 수 있는 거 맞아? 이렇게 생각하면서 예약을 하는데도, 기대감이 올라왔다. 어떤 곳일까. 다른 디지털 노마드들이 가득한 곳에서 나는 무슨 경험을 하게 될까.  

비행기표도 예약했다. 항공사 마일리지로 이코노미 좌석을 구매했다. 스페인으로 직항은 바르셀로나하고 마드리드가 목적지 선택이 가능했는데 둘다 마일리지 예매 좌석들이 다 마감되었는지 불가능한 상황이어서 런던행을 대신 샀다. 떠나기는 하지만 계속 일을 하니까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여행을 조금 할까, 친구들도 오랜만에 만나도 되고! 유럽 자체가 처음이니까 어디를 가도 새롭겠지, 2년간 일 안쉬고 했으니까 이번을 기회로 주말 앞뒤로 일 안하는 며칠을 보내보자 그렇게 생각을 했다. 런던 숙소도 예약하고 런던에 있는 친구한테도 메세지를 보냈다. 

그리고 나서는 한국에서의 남은 시간들을 잘 보냈다. 투자 사이트에서 당첨된 신라호텔 멤버쉽으로 엄마랑 호캉스도 하고, 비싼 레스토랑에서 밥도 먹었다. 친구들과 앞으로의 계획도 나누고 인생네컷 사진도 찍었다. 끝이 정해진 시간이라 빠르게 흐른 것일까, 한국에서의 다를 것 없는 일상이 반복적인 삶이라 빠르게 흐른 것일까? 5월이 되었고, 나는 오랜만에 캐리어를 꺼내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 싸는 데에는 도사였었는데, 2년 만에 장기로 머물 짐을 싸려니 헷갈리기 시작했다. 가방까지 다 싸고 나니까 부모님은 내가 진짜 가는구나 실감이 나셨나보다. 아빠는 정말 한국에서 교사나 공무원으로 살 생각은 없는지 또 물어봤다. 시험준비 아직 늦지 않았다고. 나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떠날 준비를 한다는 것은 그렇다. 나만 준비하는 것이 아니고, 주변 사람들도 준비를 함께 하게 된다. 떠나는 사람도, 떠나보내는 사람도, 빈 자리를 만든다. 그 사람이 돌아올지, 얼마나 자리를 비울지, 더 커져서 올지, 우리는 미래를 모르지만, 비워내는 자리가 있어야 새 것도 담으니까. 비워내는 자리가 있다고 해서 흔적이 남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내 마음에는 새 경험들을 담을 자리들이 있다. 내 그릇은 앞으로 더 넓어질 터였다. 

그렇게 비행기를 탔다.